본문 바로가기
여행

빅토르 위고 (victor hugo)의 일생, 빅토르 위고의 집 방문 후기

by 달리는토끼 2024. 6. 21.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서양 문학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파리 여행 중 우연히 빅토르 위고의 저택 앞을 지나가게 됐고 방문하게 되었다.
보쥬광장에 위치해 있다. 입장료도 무료여서 지나가다가 방문해 보았다. 


<위치>

6 Pl. des Vosges, 75004 Paris, 프랑스

위고는 1822년에 처음으로 시집을 발표한 후, 왕당파적이고 가톨릭적인 주제로 유명한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며 낭만주의 운동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았고, 그의 희곡 "크롬웰"의 서문은 고전주의에 도전하는 중요한 선언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동방시집"과 희곡 "에르나니"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정치적 활동과 개인적인 생애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건에 휘말리면서, 빅토르 위고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해 6월에는 중도주의를 반대하던 급진파와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위고는 국회의 대표로 바리케이드에 파견되어 봉기를 진압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 경험은 나중에 그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위고는 처음에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나중에는 그의 반동 정치를 격렬히 비판하게 됩니다. 1851년 12월에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인사로 낙인을 찍히게 되고 벨기에로 망명을 떠납니다. 그는 계속해서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며 망명 생활을 지속하다가, 마침내 영국령 채널 제도에 있는 건지 섬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망명 생활 동안 위고는 "징벌" (1853), "명상시집" (1856), "세기의 전설" (1859, 제1집), "레미제라블" (1862), "바다의 노동자" (1866) 등의 작품을 연이어 발표했습니다. 1870년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프랑스로 돌아와 환영을 받지만, 정치적 실망으로 국회의원직을 포기하고, 가족의 비극과 코뮌 사건으로 인해 벨기에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후 건지 섬에서 말년의 대표작인 "93년" (1874)을 집필한 후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1881년 2월 26일, 빅토르 위고의 80번째 생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어 군중들이 그의 집을 찾아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며 8월 31일에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유언장에는 신과 영혼, 책임감에 대한 신념을 밝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4만 프랑의 기부를 명시했습니다.

1885년 5월 18일, 위고는 폐렴으로 병세가 악화되고 22일에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검은빛이 보인다"였고, 장례식은 대규모로 치러졌으며 그의 유해는 200만 명의 인파가 따르는 가운데 팡테옹에 안장되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저택
운영시간 : 10시~18시(월요일 휴무)
입장료 : 무료

3층 저택이었다. 집구경 하고 나온 느낌으로 둘러보고 왔다. 옛날 유럽사람들은 왜 저렇게 높은 침대를 썼는지 궁금했다. 1층에 정원도 있고 집도 3층이나되고 좋은 집이었다. 한국어 설명이 없어서 구경을 눈으로만 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